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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사북 동원탄좌 노동자 총파업투쟁(1980년 3월)
첨부파일 -- 작성일 1980-03-05 조회 350

사북 동원탄좌 노동자 총파업투쟁

 

시기 : 198035~ 424

요약 : 1980년 열악한 노동 환경과 저임금에 시달리던 사북 탄광노동자들이 어용노조 퇴진과 임금인상 등을 요구하며 펼친 투쟁으로, 신군부의 탄압에도 가족까지 합세해 지역 차원의 투쟁으로 확산됐다.

 

 

19804월 사북, ‘광산쟁이라 불리던 노동자와 가족들의 분노가 폭발했다. 이를 두고 언론은 이재기 지부장파와 이원갑파의 노조 지부장직을 둘러싼 권력다툼에서 촉발된, 광부들이 극도로 흥분한 상태에서 벌어진 사태라고 보도했다. 그렇게 오랫동안 왜곡돼 알려져 왔으나, 시간이 지나면서 그 주체들이 진실을 밝혀냈다. 

 

당시 산재 관련 통계를 보면 1979년 전국의 탄광 노동자 수가 53,000여 명이었는데 그해 사고로 희생된 노동자 수가 5,300명을 넘었다(사망 221, 부상 5,100여 명). 국내 최대 민영 탄좌였던 동원탄좌는 1980년 당시 직영에서만 3,052명의 노동자가 3,609Ha, 23개 광구에서 연 160톤의 석탄을 캐내고 있었고, 하청 탄광에서도 2,000여 명의 노동자가 연 70만 톤을 캐내고 있는 대형탄광이었다.

 

대형 탄좌라고 해서 노동조건이 나았던 것은 아니다. 노동자들이 사는 사택은 6평 남짓한 방 한 칸에 부엌 하나가 전부였고, 공동우물과 공동화장실을 이용했다. 노동자들은 샤워 시설이 없어 탄광에서 나와 씻지도 못했다. 그런데도 임금은 월평균 155,000, 월급날은 빚쟁이들과 싸우는 게 흔한 풍경이었다.

 

이렇게 노동자들은 목숨을 건 저임금노동에 시달리고 있었지만 1964년 설립된 전국광산노동조합연맹(광산노련) 동원탄좌지부는 노동자를 위한 일은 하지 않고 보험금 횡령으로 지부장이 잡혀가는 등 비리가 들끓었다. 몇몇이 간선제라는 점을 이용해 깡패를 동원하고 돈봉투로 대의원을 매수해 권력을 유지했다. 1979년 노동자들은 6대 지부장 선거를 앞두고 비리를 저지르면서도 장기 권력을 유지해가는 이재기에 대한 불만을 드러내기 시작했다. 그러나 선거 결과, 이번에는 바꿀 수 있을 것으로 생각했던 이원갑은 떨어지고 부정선거로 이재기가 또다시 당선됐다. 조합원들은 광산노련에 진상조사를 요구했고 광산노련은 이재기와 지부 임원 선거를 다시 하기로 합의했다. 그러나 선거 직전 이재기는 연임을 위해 대의원 제주도 나들이를 한 후 집행부 신임투표를 강행했다. 무엇보다 노동자들의 분노를 산 건 이재기가 회사와 임금 20% 인상에 합의한 점이다. 이는 광산노련의 1980년 임금인상 요구액 85,000(42.75%)조차 무시한 것이다.

 

198035일 이원갑을 중심으로 대의원 8명이 이재기는 무자격자라며 광산노련에 이의를 제기했고, 재선거를 시행하라는 촉구서도 제출했다. 416일에는 서울 광산노련 사무실을 점거하고 농성을 벌였다. 임금인상 문제에 대한 이재기의 해명을 조건으로 광산노련이 중재를 위해 사북에 내려왔지만 문제는 해결되지 않았다. 418, 노동자들은 21일 조합원 총회와 이재기 퇴진, 임금 40% 인상을 요구했다. 이재기는 눈도 끔쩍 안 했을 뿐만 아니라 한술 더 떠 경찰에 신변보장을 요청했고, 경찰은 앞장서 투쟁하던 신경을 연행했다. 노동자들이 사북지서 앞에서 항의 농성을 벌여 결국 신경은 석방됐지만, 경찰이 허가하기로 약속했던 21일 집회는 불허됐다. 노동자들이 지서로 몰려가 이에 항의하자 정선경찰서 이운선이 도망쳐 지프에 올라타, 이를 막아서자 그대로 출발해 사람을 타넘고 들이받아 버렸다.

 

이 사건은 경찰이 광산 노동자를 죽였다는 이야기로 퍼졌다. 노동자들은 지서를 파괴하고 지서장을 공격했다. 밤이 되면서 노동자들은 광업소 간부들과 어용노조 간부, 공화당 간부 집을 공격했고, 22일에는 가족들까지 가세해 숫자가 3,000여 명으로 불었다. 이날 지부장의 아내를 찾아내 린치를 가하기도 했다. 오전부터 100여 명의 기동경찰이 투입돼 안경다리를 두고 노동자와 격전을 벌였다. 노동자들은 공포와 최루탄에 맞서 돌을 던지며 싸웠다. 오후 들어 경찰이 밀려 사북읍에서 완전히 철수했다.

 

상황이 이렇게 되자 정부가 협상을 제안해, 22~23일 협상이 진행돼 42411개 항의 합의 문서가 만들어졌다. 합의내용은 이재기 지부장과 집행부 사퇴 부상자치료 및 보상금 회사 부담 피해주택 복구 회사 부담 하청업체의 노임과 상여금 상향조정 신용협동조합 미지급금 회사 부담 79년 징계자 상여금 삭제액 지급 사건으로 인한 4일분 휴업수당 지급 1~2월 임금인상 소급분 20%5월에 지급하고 탄가 인상 때 재조정 상여금 250%400%로 인상 경찰 실력행사 절대 삼가 회사와 당국의 사태 해결 최대 노력 등이었다.

 

428일 정상조업이 시작됐다. 그러나 신군부는 약속을 어기고 파업주동자를 색출하고 적극 가담자를 검거하기 시작했다. 숱한 사람들이 연행됐고 70여 명이 넘는 광산노동자와 부인들이 계엄군에게 고문을 당했다. 주동자는 계엄보통군법회의에 넘겨져 징역 3~16월 형을 선고받았다.

 

투쟁 이후 신군부는 동원탄좌가 10억 원을 내도록 해서 동원복지회관을 건립하고, 임금인상과 각종 교육비를 지원했다. 노동자들은 그제야 탄광에서 나와 씻고 집에 갈 수 있게 됐다. 사북 노동자들의 투쟁은 어용노조에 대해 경종을 울렸고 지역 전체 투쟁으로 확산한 투쟁이었다. 조직적 대응을 하지 못해 한계가 드러났다는 평가도 있지만, 사북항쟁은 80년 봄 전국의 투쟁에 영향을 미쳤다. 언론은 사북항쟁 이후 고한의 3개 덕대 광산 광부 농성, 부평 반도상사 임금인상 요구 농성으로 투쟁이 번지고 있다고 보도했다. 이 투쟁은 5월 광주항쟁으로 이어지며 신군부의 간담을 서늘하게 하였다. 그래서 사북항쟁은 더욱 오랜 시간 왜곡되었고, 그 주인공들은 침묵을 강요당했다. 그러나 그 투쟁의 경험은 마침내 878월 노동자대투쟁의 물결로 이어졌다.

 

참고자료 : 안재성, <타오르는 광산>(풀빛, 198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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