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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3자개입금지 등 노동악법 철폐 투쟁(1995년)
1995년 임금인상투쟁을 앞둔 정권의 공세
1995년 초 정부는 이른바 ‘세계화 추진’이라는 이데올로기 공세로 독점자본 중심의 경쟁력 강화를 적극 지원하기 위해 과거의 기만적인 노사관계 기조를 강화했다.
정부 정책의 기조는 “갈등과 대립의 노사관계를 협력과 생산적 관계로 전환하고, 임금은 생산성 범위 내에서 인상케 하여 경쟁력을 확보해야 하며 국가 주도하에 노동력 공급관리 정책을 적극적으로 추진하여 자본의 탄력적인 고용정책을 뒷받침한다”는 것이었다.
이러한 정책 기조를 유지하기 위한 구체적 방법으로 첫째, 제3자개입 차단, 노조 전임자 축소, 무노동 무임금 엄격 적용, 노동조합 정치 활동 금지 등 노동 악법 적용을 강화하고 둘째, 공익연구단이라고 주장하는 ‘임금연구회’의 관변학자들을 동원해 임금 가이드라인 정책을 추진하고 셋째, 고용보험제(7월 1일 시행, 적용대상 30인 업체 한정 등 기존 안 유지)를 바탕으로 한 산업인력 개발체제 구축 및 외국인력 수입 양성화(별도 법률 제정 검토) 등을 제시했다.
노동법개정은 김영삼 정부 집권 동안 사실상 전면 백지화됐고, 법 적용과 관련한 정책 기조 역시 과거 전두환·노태우 정권과 별다른 차이가 없었다. 김영삼 정부는 집권 초기부터 ‘제3자개입’에 대한 강력 대처를 천명하고, 공권력 개입을 보다 공세적으로 추진했다. 1994년 전국지하철노동조합협의회(전지협)의 연대투쟁에 대한 탄압은 그 전형적인 수법이었다. 이러한 공권력 투입, 핵심간부에 대한 구속·수배 등의 기조는 임금 억제, 현행 노동 악법 사수와 더불어 1995년에도 그대로 계속될 움직임을 보였다. 특히 제3자개입금지 조항은 민사상의 손해배상 청구 소송과 더불어 민주노총 결성을 방해하고 투쟁사업장의 동력을 와해시켜 노동조합의 공동투쟁을 차단할 목적으로 계속 활용되고 있었다.
한편 전노협은 1995년 임금인상 투쟁 시기에 지역·산업별 공동투쟁의 기틀을 마련하기 위해 지역과 산업(업종)별로 다양한 투쟁을 전개한다는 방침을 세웠다. 민주노조 진영의 다수가 산업·업종별 조직으로 재편되는 과정에서 상급단체가 산하 단위노조에 대한 지원과 지도, 공동투쟁을 추진하는 것은 당연하다. 그런데 그 상급조직이 노동법상 여전히 법외조직이어서 지원 활동을 한 상급단체는 모두 제3자개입에 해당하기 때문에 이 문제를 둘러싼 대립은 불가피했다.
제3자개입금지 조항의 문제점
노동조합법 제12조 2 ‘제3자개입금지’ 조항은 “직접 근로관계를 맺고 있는 근로자나 당해 노동조합 또는 법령에 의하여 정당한 권한을 가진 자를 제외하고는 누구든지 노동조합의 설립과 해산, 노동조합에 가입, 탈퇴 및 사용자와의 단체교섭에 관하여 관계 당사자를 조종, 선동, 방해하거나 기타 이에 영향을 미칠 목적으로 개입하는 행위를 하여서는 아니된다. 다만, 총연합단체인 노동조합 또는 당해 노동조합이 가입한 산업별 연합단체인 노동조합의 경우에는 제3자개입으로 보지 아니한다(1986.12 31. 단서 신설)”로 규정하고 있다.
또 노동쟁의조정법 제13조의 2 ‘제3자개입금지’ 조항은 “직접 근로관계를 맺고 있는 근로자나 당해 노동조합 또는 법령에 의하여 정당한 권한을 가진 자를 제외하고는 누구든지 쟁의행위에 관하여 관계 당사자를 조종, 선동, 방해하거나 기타 이에 영향을 미칠 목적으로 개입하는 행위를 하여서는 아니된다. 다만, 총연합단체인 노동조합 또는 당해 노동조합이 가입한 산업별 연합단체인 노동조합의 경우에는 제3자개입으로 보지 아니한다(1986.12 31. 단서 신설)”로 규정하고 있다.
이 두 조항은 모두 1980년 말, 전두환 등 신군부가 군사쿠데타를 일으켜 권력을 장악한 후 노동운동을 제약하기 위해 만든 대표적인 악법이다. 이후 1988년 이래 계속된 노동법개정 투쟁의 성과로 당시 여소야대 국회에서 이 조항의 폐지를 포함한 개정안이 국회를 통과했으나, 노태우의 거부권 행사로 개정이 좌절됐다. 그런데도 당시 김영삼 민주당 총재가 대통령이 된 이후 이 법안을 적용해 단병호 전노협 전 위원장, 양규헌 전노협 위원장, 권영길 업종회의 의장 등을 수배하는 등 여전히 노동 탄압의 도구로 이용했다.
그러나 제3자개입금지 조항은 매우 애매하고 불명확한 법 조항이었다.
첫째, ‘법령에 의하여 정당한 권한을 가진 자’의 범위가 불명확해서 개입행위를 한 제3자에 대한 선별 여부도 정부의 판단에 따르게 되어 있어 자의적인 탄압이 가능했다.
둘째, 개입금지 대상행위 자체도 모호해서 단순한 조언과 격려는 금지되지 않지만 선동, 조종, 방해는 개입행위가 된다는 식이다. 그러나 조언과 조종은 엄밀하게 구별되지 않으며, 격려와 선동 역시 그렇다.
셋째, 노동자들이 노동조합을 결성하거나 사용자와 단체교섭을 할 때, 그리고 쟁의를 할 때 외부의 지원과 연대는 필연적이다. 이러한 지원과 연대를 차단하는 법률은 노동조합의 발전을 가로막는 것이며 헌법이 보장한 노동3권의 취지에도 정면으로 배치되는 것이다.
게다가 제3자개입금지는 국제노동기구(ILO)로부터 강력한 폐지 요청을 수차례 받았고 노동부에서조차 이 조항이 노동운동의 통제수단임을 자인한 바 있다. 노동부는 직접 노사관계를 맺고 있는 근로자가 아니거나 법으로 정당한 권한을 갖지 않으면 해당 노조 운동에 관여할 수 없도록 규정한 현행 제3자개입금지 조항을 철회하기로 내부 방침을 정하기까지 했다.(<중앙일보> 1993년 5월 26일 자 보도)
제3자개입금지 조항을 이용한 탄압 사례
△불특정의 금품을 전달한 행위(대법원 1990.4.10. 89도2415사건) : 1989년 당시 마창노련 이흥석 의장이 쟁의 중이던 마창노련 산하 세신실업노조를 방문해 라면 한 상자를 전달했다는 이유로 구속된 사건이다. 쟁의 관계 당사자에게 금액이나 수량이 특정되지 않은 금품의 전달만으로 강력한 투쟁을 유도했다고 보기는 어려우나 금품의 금액 외에 기타 제반 사정을 고려할 때 제3자개입이 인정된다는 판결이다.
△쟁의발생 조짐이 있는 사업장에서의 연설행위(대법원 1990.3.13. 89도2512사건) : 임금협상을 목전에 둔 상태에서 임금인상 투쟁 발대식을 가지는 등 쟁의발생 조짐이 있는 회사의 사업장에서 선동적인 연설과 구호 제창을 계속했다면 제3자개입에 해당한다는 판결이다. (통일중공업노조 전 위원장 문성현 사건)
△ 파업사업장 방문해 성금 전달한 행위(대법원 1993.1.29. 90도450사건) : 1989년 현대중공업노조 파업 당시 이부영이 농성현장을 방문해 20만 원의 지원 성금을 전달한 사건으로, 법원에서는 자극적이고 투쟁을 고취하는 연설을 해 분위기가 고조되었다는 이유로 유죄판결을 내렸다.
△임시대의원대회에서 해고자 원직 복직 유인물 배포(대법원 1994.2.8. 93도120사건)
대우자동차 해고자 유길종이 1991년 임금인상 투쟁을 위한 임시대의원대회를 앞두고 ‘대의원 동지들에게 드리는 글’과 ‘선별 재입사 분쇄하고 원직복직 쟁취하자’라는 유인물을 배포한 데 대해 단체교섭을 체결하려는 노동자들의 의사결정에 영향을 미쳤다며 제3자개입금지를 적용해 구속했다. 그러나 항소심에서는 법률의 다툼을 갖는 해고자뿐만 아니라 여타의 방법으로 해고 상태에 대한 협의가 있다면 당사자로 보아야 한다는 판결과 함께 무죄를 선고했다. 대법원에서도 직접적인 이해당사자로서 자신의 문제를 해결하기 위한 행위로 인정해 무죄를 선고했다.
△파업 중인 사업장에 대한 지원 호소행위
단병호 전노협 위원장이 1993년 4월 30일 마산시에서 열린 마창노련 주최 강연회에서 현대그룹노동조합총연합(현총련) 파업에 동참할 것을 호소했다는 이유로 검찰에서 수배 조치를 내렸다.
△파업 중인 사업장에 대한 공동투쟁 결의행위
1994년 전지협 투쟁에 대한 제3자개입 혐의로 당시 양규헌 전노협 위원장과 권영길 업종회의 의장이 수배됐다.
한편 1989년부터 1995년까지 제3자개입금지 조항 위반으로 구속된 노동자는 119명이나 된다. (전노협, ‘전노협 구속자 통계(1988년~1995년)’)
제3자개입금지 조항 무력화 투쟁 결의과정
1995년 2월 9일에 열린 민주노총준비위 2차 운영위원회 회의에서는 제3자개입금지 조항 무력화를 위한 적극적인 결의로 2월 16~17일 수련대회 참가자들의 결의 서명을 받고, 해고자 복직과 구속자 석방 등의 문제를 노동법개정 투쟁과 결합해 진행하기로 했다.
또 2월 28일에 열린 ‘금속일반노동조합 추진위원회(금속일반추진위)’ 6차 대표자회의에서 제3자개입금지 무력화 공동투쟁을 제안했다. 금속일반추진위는 산업·지역별 공동 연대투쟁을 선언하고 제3자개입 등 노동악법을 이용한 탄압이 가해지면 ‘악법 어기기 운동’을 전개하기로 결의했다. 구체적으로 부천 대흥기계 투쟁 연대 결의를 통해 제3자개입 무력화 투쟁에 적극 나서기로 했으며, 임금인상 투쟁 시 악법을 이용한 탄압이 집중될 것이므로 공동 연대 전선을 구축하고 조합원 총회 등에서 기금을 적립해 실질적으로 지원하기로 했다. 그리고 ‘제3자개입금지 조항 무력화 투쟁 결의 및 공동투쟁’을 3월 2일 전국조선업종노동조합협의회(조선노협), 현총련, 전국자동차산업노동조합연맹(자총련) 등에도 제안했다.
3월 10일 ‘영남지역 노동조합 대표자회의(영남노대)와 영남금속추진위원회는 제3자개입을 공식 선언했다. 금속일반추진위에서 제안한 제3자개입 선언을 적극 실천하고 현총련에 요청해 민주노총준비위와 민주노조운동 진영에 제안토록 한다는 방침을 세웠다. 또 4월 중에 투쟁사업장의 연대 집회를 하기로 하고, 5월 1일 노동절에 대대적인 ’3자 개입‘을 선언하기로 했다. 그리고 민주노총준비위 대표자 등 전국 민주노조운동 진영의 대표자를 망라한 1,000여 명 연명으로 각종 언론이나 선전지를 통해 ’3자 개입‘을 선언해 정권의 탄압을 사전에 무력화하기로 했다.
현총련은 3월 15일 민주노총준비위 4차 운영위원회 회의에 제3자개입금지 조항 무력화 투쟁을 제기하고, 차기 회의까지 각 조직의 결의를 모아 5차 회의에서 결정하기로 했다.
전노협은 3월 23일 대표자회의에서 제3자개입금지를 확실하게 무력화하기 위한 적극적인 투쟁을 전개하기로 결의했다.
3월 28일에 열린 민주노총준비위 5차 대표자회의는 ’3자 개입‘ 선언에 대한 기자회견을 열어 임단협투쟁과 사회개혁투쟁 계획을 천명하고 정부에 4월 말까지 △제3자개입금지 조항 철폐 △복수노조 인정 등 자주적 단결권 보장 △직권중재·일방중재 조항 철폐 △노조의 정치 활동 금지 조항 철폐 등 현행 노동법의 독소조항을 개정할 것을 요구하기로 했다. 이를 거부할 경우 총력투쟁을 전개하고 대표자 연서명을 담은 대자보를 제작·배포하고 조합원 서명운동을 전개하기로 했다. 이후 4월 14일 민주노총준비위 5차 운영위원회 회의에서 이러한 결정사항을 재결의했다.
4월 15일 ‘한화전자정보통신노동조합 탄압 공동대책위원회’(성남노련, 민주노총 경기동부지역추진위원회, 전국택시노동조합연맹 동부직할사무소, 지역 노동단체로 구성)도 한화전자정보통신노동조합 탄압 항의집회에서 3자 적극 개입을 선언하고, 민주노조 사수 차원에서 강력히 투쟁할 것을 다짐했다.
이러한 아래로부터의 결의를 바탕으로 민주노총준비위는 제3자개입금지 철폐 투쟁을 공세적으로 전개하기로 했다. 민주노총준비위는 직권중재 제도의 문제점과 개혁 방안에 대해 정책토론회를 열고, 제3자개입금지 등 노동 악법 철폐를 주장하는 대자보를 대표자 명의로 발행했다. 노동법개정과 제3자개입금지 철폐 투쟁에 대한 대중 조직화 사업의 하나로 조합원 서명운동도 벌였다.
제3자개입금지 조항 무력화 투쟁 경과
△부천
부천지역은 1995년 들어 노동운동 탄압 분쇄투쟁이 과거보다 매우 활발하게 전개됐다. 노조탄압 규탄을 위한 철야농성과 대시민 홍보 활동, 중식 보고대회를 추진했고 5월 31일에는 부천역 집회를 힘차게 개최했다. 또 6월 3일 지역지도부 3인을 구속한 경찰의 만행에 맞서 10여 일 동안 투쟁했다. 부천 중부경찰서 앞 항의 규탄 투쟁을 6월 3일부터 7일까지 5일간 빠짐없이 전개하고, 6월 5일과 8일에 철야농성, 6월 8일 홍보전, 6월 10일 부천역 앞 집회 등 숨 가쁜 투쟁을 벌였다.
부천에서는 구속자 석방 투쟁 기조를 두고 “더욱 공세적으로 나아가야 한다”는 의견과 “더 이상의 침탈을 막는 선에서 방어적 기조로 나아가야 한다”는 의견에 대해 치열하게 논의한 결과 후자로 결정해 6월 10일 집회를 합법적 집회로 준비하고 이후에는 면회투쟁으로 전환하면서 사실상 대응 투쟁이 마무리됐다.
△대구
대구노련은 임금인상 투쟁 시기 노동 악법 철폐 투쟁의 초점을 전국적인 연대투쟁과 산업·업종별 공동투쟁의 가장 큰 걸림돌인 제3자개입금지 조항 철폐를 위해 노조 대표자와 조합원의 3자개입 선언을 주요 실천방침으로 정했다. 비록 ‘3자 개입’ 선언을 위력적으로 조직하지는 못했으나 본격적인 투쟁 시기에 투쟁사업장에 대한 지역 차원의 각종 지원, 단위노조 지지연설과 지지방문, 투쟁 결합 등 ‘3자 개입’ 실천을 모범적으로 진행했다.
1994년 하반기 정부의 근로자파견법 도입 방침에 맞서 대구지역에서는 전국적으로 진행된 철야농성에 동참하고 민자당 국회의원 항의방문, 성명서·기자회견 등을 통한 여론화, 단위노조 현수막 부착, 근로자파견법 저지 실천지침 제작·배포, 단위노조별 유인물 제작 배포 등 다양한 사업과 투쟁을 전개했다.
동협정밀, 영남대병원, 경북대 등 노조가 벌인 대구지역의 대표적인 투쟁들은 자본의 민주노조 무력화와 불성실 교섭에 맞선 방어적 투쟁이었다. 지역 차원에서 동협정밀은 성실 교섭 촉구대회와 사장 집 항의방문, 영남대병원은 두 차례 노조탄압 분쇄와 성실 교섭 촉구대회, 전국노동자대회, 일상적 규찰 등을 통해 자본에 타격을 가하고자 했다. 그러나 현대자동차 양봉수 열사 투쟁 이후 지역의 모든 노동역량이 효과적으로 결집하지 못한 아쉬움을 남겼다. 동협정밀, 영남대병원, 경북대, 대동공업 등의 투쟁이 시기적으로 집중돼 노조탄압 분쇄를 위한 지역 전선을 구축할 수 있는 유리한 조건이 형성됐지만, 단위사업장 투쟁을 수행함과 아울러 지역 투쟁사업장을 연대 전선으로 세울 수 있도록 실천적 사업을 펼쳐나갈 중심 사업장이 부재했다. 투쟁이 수세적·방어적으로 진행됨으로써 노조탄압 분쇄를 위한 힘 있는 지역 전선을 구축하지 못한 채 개별 단위사업장 차원의 투쟁에 머무르고 말았다.
1987년 노동자대투쟁 이후 노동법개정 투쟁의 핵심사항인 제3자개입금지 철폐 투쟁은 1995년 임단협투쟁을 통해 지금까지의 요구 투쟁 차원에서 벗어나 ‘3자 개입’ 실천이라는 적극적인 투쟁으로 전개됐다. 대구노련은 ‘3자 개입’ 실천 의지를 표명하는 단위노조 대표자와 조합원 서명, 투쟁사업장 지원 방문 등을 결의했다. 아울러 ‘3자 개입’으로 인한 구속자가 발생하자 석방 투쟁도 전개했다.
정우달 대구노련 전 의장은 1994년 경북대병원·대우기전·동산병원 등 노조 투쟁에 ‘3자 개입’, 쌀 수입개방 저지를 위한 노동자·농민대회에 집시법 위반과 폭력혐의로 1월 8일 구속됐다. 대구노련과 대구지역 민주노총추진위는 대표자들을 조직해 대구북부경찰서에 즉각적인 항의방문을 전개했고 노조 간부, 조합원, 단체와 함께 70여 명이 노동청에 항의 방문했다. 그리고 규탄 대자보, 석방 현수막, 교도소 면회투쟁과 변호사 비용 마련을 위한 모금운동을 벌였다. 하지만 1995년 임단협투쟁에서 제3자개입금지 조항 철폐 투쟁의 핵심내용으로 ‘3자 개입’ 실천을 설정했음에도 정우달 의장 석방 투쟁과 ‘3자 개입’ 실천투쟁을 대중적인 집회 등으로 모아내지 못한 아쉬움이 있었다.
영남대병원, 동협정밀, 경북대 노조 투쟁과 양봉수 열사 투쟁, 한국통신 공권력 투입 규탄 투쟁 등에 ‘3자 개입’했다는 혐의로 박용선 대구 민주노총추진위 상임대표가 8월 24일 새벽 연행됐다. 대구 민주노총추진위 대표들은 대구북부경찰서를 방문해 박용선 대표와 특별면담하고 대표자 차원에서 노동청에 항의 방문했다. 저녁에는 긴급하게 대구 민주노총추진위 대표자회의를 열고 현수막 걸기, 규탄 철야농성, 지역 선전전 등을 전개했다. 8월 25일에는 100여 명이 노동청 항의투쟁을 전개하고 영남대병원노조의 투쟁과 결합해 지역 노동자 600여 명이 참여한 지역집회를 열어 석방 투쟁을 전개했다.
영남대병원노조 투쟁 과정에서 위원장, 간부들과 조합원 300여 명이 연행되자 남은 조합원들과 지역 노동자들 100여 명이 시내 각 경찰서 항의방문 투쟁을 힘차게 전개해 연행된 조합원들이 위축되지 않고 자신감을 얻어 이후 파업투쟁에도 적극 참여하는 성과를 거뒀다.
△마산․창원
‘마산․창원지역 공동투쟁본부(마창공투본)’는 민주노총 준비위원회의 방침을 받아 노동법개정 투쟁을 임단협투쟁과 적극 결합해 전개한다는 방침을 분명히 했다. 특히 노동자의 단결과 연대를 제약하는 제3자개입금지 조항을 ‘3자 개입’ 선언 등 적극적인 실천을 통해 무력화하고자 했다. 이러한 방침을 구체화하기 위해 마창공투본은 금속일반추진위를 중심으로 ‘3자 개입’ 선언 서명운동에 적극 앞장섰고, 그 결과 단위노조의 대표자와 간부뿐만 아니라 조합원들까지 대거 참가하는 성과를 거두기도 했다. 이러한 활동으로 조합원들에게 제3자개입금지 조항의 심각성을 인식시키고 노동 악법 문제를 사회 쟁점화시키는 한편 연대투쟁도 활성화했다.
제3자개입금지 철폐 투쟁이 활발하게 전개된 데 비해 다른 악법 조항들에 대한 철폐 투쟁은 상대적으로 소홀했다. 특히 직권중재와 일방중재 조항은 단위노조의 단체행동권을 제약하는 최대의 걸림돌로 작용하고 있었으나(한국중공업, 범한금속, 쌍용자동차) 마창공투본 차원에서 이를 적극적으로 쟁점화시키려는 노력이 부족했다. 그럼에도 한국중공업노조가 조합원을 대상으로 일방중재 철폐를 쟁점화시켜내고 1998년 임단협 교섭 시 이를 삭제키로 합의한 것은 커다란 성과였다.
효성중공업, 기아기공 등 사측에서는 해고자 복직과 사회개혁 요구가 교섭 대상이 아니라는 이유로 교섭을 철저히 피했다. 마창공투본은 해당 노조와 적극 연대해 선전전, 노동부 항의방문, 공동 출근투쟁, 지원 방문, 규탄 집회 등 다양한 투쟁을 전개하여 임단협투쟁의 분위기를 고양하고 연대투쟁과 공동투쟁의 기운을 확산시켰다. 특히 4월 21일 효성중공업 집단 출근투쟁 과정에서는 공투본 집행위원과 통일중공업노조 사무국장이 관리자들과 몸싸움 끝에 경찰에 연행되기도 했지만 창원경찰서 항의농성을 펼친 끝에 연행자들을 석방시키기도 했다.
1995년에도 예외 없이 자본과 정권은 민주노조의 집행부와 조합원들을 분리해 임단협투쟁을 무력화하고자 노동 악법과 각종 민·형사상의 법률을 동원한 탄압 공세를 펼쳤다. 임단협 과정에서 자본과 정권이 가장 많이 이용한 수법은 역시 노동쟁의조정법 위반과 업무방해 등을 빌미로 한 고소·고발이었다. 이러한 탄압은 효성중공업, 기아기공, 한국중공업, 두산기계 등 투쟁사업장에서 예외 없이 벌어졌는데 기아기공과 한국중공업은 해고자들과 간부들이 대거 구속·수배되기도 했다. 손해배상 청구는 투쟁이 장기화한 한국중공업에서만 나타났다. 마창공투본은 손해배상 청구 공세에 대비해 소송고지와 피고 보조 참가를 위한 사전 작업으로서 조합원 서명운동을 조직적으로 펼쳐 손해배상 청구를 사전에 차단하고 조합원의 단결력을 높여갔다.
한편 임단협 과정에서 특징적으로 나타난 법적인 탄압 중의 하나는 단체행동을 막기 위한 정부 당국의 행정지도와 가처분신청 등이었다. 주로 해고자 복직이나 사회개혁 등의 요구가 교섭 대상이 아니다, 실질적인 교섭이 부족했기 때문에 쟁의 발생 요건이 안 된다는 식의 논리였다. 특히 가처분신청은 효성중공업에서 노조의 쟁의 일정을 원점으로 돌려놓는 효과를 발휘하기도 했다. 마창공투본은 임단협투쟁 과정에서 발생하는 다양한 법적인 탄압에 대응하기 위해 기획 교육을 진행하고 노동부 항의방문을 전개하는 등 노력했으나 실제로 단위노조들이 법적인 공세를 정면으로 돌파하는 데는 역부족이었다.
제3자개입금지 조항 철폐 투쟁의 성과와 한계
노동법개정 투쟁은 임금인상 투쟁과 맞물려 제3자개입금지 무력화 투쟁으로 집중해 진행됐다. 3자개입 선언이 대중적으로 진행되고 분위기가 활성화되면서 정부·자본은 임금인상 투쟁의 기세를 꺾기 위해 지도부를 제3자개입금지 조항 위반으로 구속·수배했던 과거에 비해 1995년에는 제3자개입금지 조항을 빌미로 한 탄압이 줄어들었다.
부천, 인천, 성남, 마창 등 지역에서도 적극적 ‘3자 개입’ 선언으로 연대투쟁의 분위기를 높여내며 제3자개입금지 조항을 무력화시켜나갔다. 임금인상 투쟁 시기 제3자개입금지 무력화 투쟁은 대중적인 3자개입을 통해 연대투쟁을 활성화하고, 노동 악법을 무력화하는 매우 유력하고도 핵심적인 고리였다.
그러나 민주노총준비위의 노동법개정 투쟁은 핵심적인 노동 악법에 대한 개정 요구를 병렬적으로 나열함으로써 요구와 투쟁이 집중되지 못한 한계가 있었다. 또 대중적인 노동법개정 투쟁과 3자 개입을 위해 조합원 서명을 받기도 했으나 서명 취합이나 이후 투쟁의 조직화 미비 등으로 단위노조와 지역의 열기를 전국적인 힘으로 모아내지 못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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