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4?28 평화회담과 오라리 방화사건
송시우 (노동자역사 한내 제주위원회)
무장봉기가 처음 일어났을 때 경비대 제9연대는 이 사건을 도민과 경찰?서청간의 충돌로 간주했다. 서울에 있는 경비대 수뇌부에서도 제주도 사건을 치안상황으로 보고, 그 진압은 경찰이 할 일이지 군이 개입할 성질이 아니라는 입장을 보였다. 그 동안 벌어졌던 군?경간의 갈등도 경비대의 출동을 주저하게 만들었다. 군인들은 경비대가 향후 창설될 국군의 모체라고 생각했으마, 경찰은 경찰예비대라는 뜻이 담긴 경비대를 무시했다. 이로 인해 전국 곳곳에서 경비대원과 경찰 사이에 마찰이 빚어졌고, 무력충돌이 발생해 사상자를 내기도 했다.
그러나 미군정 수뇌부는 경찰력만으로 한계를 느끼자 4월 17일 제주주둔 미군 제59군정중대장 맨스필드 중령을 통해 경비대 9연대에게 진압작전에 참여토록 명령했다. 아울러 부산 제5연대 1개 대대(진해 주둔)를 4월 20일 부로 제주에 파견하도록 명령하면서 부산 제3여단의 미고문관 드루스 대위가 이에 합류해 동참하도록 하였다.
4월 28일 김익렬 연대장과 무장대 총책 김달삼 간의 평화협상은 이런 과정을 겪으며 추진되었다. 이 평화협상은 제주4?3사건의 전개과정에 있어서 매우 중요한 갈림길이었다. 협상이 실패로 돌아감에 따라 유혈사태가 벌어졌고, 후에 김익렬 연대장이 곤욕을 치르기도 했다. 그런데 평화협상은 김익렬 연대장 혼자의 결정으로 이뤄진 게 아니었다. 딘 장군은 이미 4월 18일에 “대규모의 공격에 임하기 전에 소요집단의 지도자와 접촉해서 그들에게 항복할 기회를 주는데 모든 노력을 다 하라”고 맨스필드에게 명령해 놓은 상태였다.
맨스필드 중령의 요청을 받은 김익렬 연대장은 즉시 무장대에게 평화협상을 요청하는 전단을 만들어 4월 22일 비행기를 통해 살포했다. 그러자 무장대 측으로부터 ‘연대장이 직접 나와야 하며, 수행인은 2명 이상은 안된다. 만남 장소는 무장대 진영이어야 하며 장소와 시기는 추후 통보하겠다’는 내용이 답신이 왔다.
김익렬 연대장은 무장대 측 요구조건을 받아들이기로 한 후, 이 사실을 맨스필드 중령과 군사고문 드루스 대위에게 보고하고 상세한 지시를 요청했다. 맨스필드 중령은 김익렬 연대장에게 “① 제9연대장 김익렬른 폭도와의 평화회담에 필요한 일체의 권한행사에서 미 군정장관 딘 장군을 대리한다. 폭도들의 살인 방화 등 범법자에 대한 재판에서 극형을 면할 수 있는 사면의 약속을 할 수 있는 권한을 주며 기타 범죄에 대해서는 불문에 부친다는 약속을 할 수 있는 권한을 준다. 서면으로 조인된 모든 약속의 이행은 미 군정장관 딘 장군이 책임진다. ② 요구조건은 즉시 전투중지, 무장해제, 범법자의 자수와 범법행위의 장소?일자?범행자 명단의 작성 제출”등 부여된 권한과 회담에 임하는 요령 등을 알렸다.

4.3평화박물관에 있는 오라리 방화 사건 설명
그런데 평화협상은 미 군정청 딘 장관의 지시에서 비롯됐지만 협상 직전 미 24군단사령부가 개입되어 ① 경비대는 즉시 임무를 수행할 것 ② 모든 종류의 시민 무질서를 종식시킬 것 ③ 무장대 활동을 신속히 약화시키기 위해 경비대와 경찰이 확실한 결속을 할 것 ④ 미군은 개입하지 말 것 등의 지시를 내린다. 하지 장군의 지시사항을 보면, 경비대를 동원해 서둘러 사태를 진압하라는 내용이 있을 뿐 ‘평화협상’에 대한 언급이 전혀 없다. 이응 하지 장군이 딘 군정장관의 방침을 전적으로 인정하지 않았음을 말해준다. 물론 딘 군정장관이 제안한 ‘평화협상’이란 결코 무장대와의 공존을 전제로 한 것은 아니다. 대규모 유혈사태를 피하기 위해 본격적인 무력진압을 벌이기에 앞서 항복을 받아내자는 ‘귀순공작’이 딘 군정장관의 구상이었다. 김익렬 9연대장도 그의 회고록에서 ‘평화협상’이라는 표현을 사용했지만 그 구체적인 내용은 ‘귀순공작’이었다. 그런데 하지 장군의 강조점은 단순히 ‘사태 진압’에 있는 게 아니라 ‘조기 종결’에 있었던 것으로 보인다.
김익렬 연대장은 1948년 4월 28일 정오 대정면 모슬포 연대본부를 떠나 회담 장소인 대정면 구억리로 가서 김달삼을 만났다. 김익렬은 우선 김달삼에게 “제9연대가 지금까지는 전투를 개시하지 않았지만, 군대는 개인의 뜻에 관계없이 명령만 내리면 복종하고 전투를 한다”며 회담이 결렬되면 곧 전투가 벌어질 것임을 알렸다. 김달삼은 “당신은 미군정하의 군대인데 나와의 교섭결과에 대하여 얼마나 약속이행의 권한이 있느냐?”고 의문을 표했다. 이에 김익렬은 “미 군정장관의 지시에 따라 왔으며 내가 가진 권한은 미 군정장관 딘 장군의 권한을 대표하며 오늘 나의 결정은 군정장관의 결정”이라고 밝혔고, 김달삼도 “나도 제주도의 도민의거자들로부터 전권을 위임받았다”고 밝힘에 따라 협상이 진행됐다.
① 72시간 내에 전투를 완전히 중지하되 산발적으로 충돌이 있으면 연락 미달로 간주하고, 5일 이후의 전투는 배신행위로 본다.
② 무장해제는 점차적으로 하되 약속을 위반하면 즉각 전투를 재개한다.
③ 무장해제와 하산이 원만히 이뤄지면 주모자들의 신병을 보장한다.
김익렬 연대장은 4시간에 걸친 협상을 성공적으로 끝내고 밤늦게 제주읍으로 건너와 맨스필드에게 보고하자 맨스필드는 큰 만족감을 표했으며 자신이 요청한대로 전 경찰에 대해 지서 밖 외부에서의 활동을 금하도록 명령을 내렸다.
그러나 협상 사흘만인 5월 1일 우익청년단이 제주읍 오라리 마을을 방화하는 세칭 ‘오라리사건’이 벌어지고 5월 3일에는 미군이 경비대에게 총 공격을 명령함에 따라 협상은 깨어졌고 이후 제주4?3사건은 걷잡을 수 없는 유혈충돌로 치닫게 되었다.
* 제주4?3사건 진상조사보고서 188~205쪽에서 발췌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