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제는 하나다, 전노협”
- 1990년 1월 전노협 출범
김 원(노동자역사 한내 연구위원)
1990년. 한국 노동운동사에 분명한 정치적·조직적 각인을 새긴 사건이 일어났다. 그것은 다름 아닌 “전국노동조합협의회”(이하 전노협) 결성이었다. 1990년 1월 22일 공안정국 하에서 억압적 국가권력의 포위를 뚫고 한국전쟁 이후 최초의 자주적이며 계급적인 전국적인 노동조합 연합이 결성되었다. 전노협은 성균관대학교 수원캠퍼스에서 창립대의원대회를 열고 단병호를 초대 위원장으로 선출하였다. 본래 창립대회는 서울대에서 열릴 예정이었으나 경찰의 원천봉쇄로 성균관대 수원캠퍼스로 옮겨 치루어졌으며, 창립대회 직후 130여명의 노동조합 관계자들이 연행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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전노협 창립대회장 모습. 사진 소장 : 전노협에서 보관하던 사진으로서 현재는 한내에서 소장하고 있음
창립 직후부터 전노협은 정부와 자본의 강경한 탄압의 대상이 되었다. 이를 반영하듯이 88년 이래 해산되기 전 95년에 이르기까지 총 구속노동자수는 1,877명에 이르렀으며, 주요 노조간부에 대한 대량 수배조치는 노조 일상 활동과 임투를 무력화시키는 지경이었다. 또 92년 이후 업무방해, 폭력행위관련법, 노동쟁의조정법 등으로 노조에 대한 다른 방식의 통제가 들어왔다.
이러한 어려움에도 불구하고 전노협은 노동해방과 평등세상이란 기치 아래 87년 이후 민노운동의 전국적 구심이자 산업별 노조를 위한 과도적 조직체로서 임무를 지속적으로 추진해왔다. 하지만 전노협은 하루아침에 만들어진 조직이 결코 아니었다. 87년 노동자대투쟁이전 이미 국가의 하위 조직으로 전락한 한국노총이 아닌, 자주적이며 계급적인 노동자운동을 희구하던 천만 노동자들의 희망의 덩어리가 전노협이었다. 87년 전국 방방곡곡에 울려 퍼진 ‘민주노조’의 함성과 가열찬 투쟁은 이제 노조를 현실적인 실체로 만들어 주었다. 87년 이후 노동자운동에서 노조가 노동자의 자주적 조직으로 정착했으며, 노조 이념으로 자주성, 민주성, 단결이란 기치가 제시되었다. 동시에 선파업-후교섭 투쟁 방식을 통한 전투적인 투쟁의 기풍이 형성되었다.

전노협 창립대회 이후 침탈 현장. 사진 소장 : 전노협에서 보관하던 사진으로서 현재는 노동자역사 한내에서 소장하고 있음.
이를 반영해주듯이, 87년 이후 노동조합은 지역과 업종을 중심으로 다양하게 연대의 틀을 스스로 구성해 나아갔다. 87년 11월 사무전문직 노조협의회 결성, 12월 마창노조총연합 등이 결성되었으며, 연이어 각 지역에서 지역을 중심으로 “지노협”이 결성되었다. 이처럼 전노협의 기본 조직체계는 지노협을 주축으로 하고, 업종노조협의회가 보조적인 축이라고 할 수 있다. 이 시기 지역을 중심으로 노조간의 연대와 조직이 이루어졌던 것은 어쩌면 당연하고 자연스러운 결과라고 할 수 있었다. 이미 80년대부터 지역은 노동운동간 그리고 노조 사이의 연대에서 핵심적인 공간이자 고리였으며, 전노협 산하 지노협의 대규모 조직화도 이런 차원에서 진행되었던 것이다. 그러나 이는 아쉬운 점이자 더 나아가 전노협의 한계이기도 했는데, 전노협은 대공장특위 등을 통해 조직 확대 강화를 추진했지만, 이들 대공장 노조가 전노협과 독립적인 조직으로 존재하게 된 사실이 그것이다.
한편 전노협 결성 직전 민주노조 진영은 88년 6월 “노동법개정 전국노동조합 특별위원회”, 88년 11월 “전태일 열사 정신계승 및 노동악법 개정 전국노동자대회” 등을 통해 조직적인 힘을 강화했으며, 이의 조직적 성과가 90년 1월 전노협 결성이라고 할 수 있다. 결성 직후 전노협은 한편으로 공동 임투와 주요사업장 선도적 배치를 통해 임투의 시기집중, 요구안 통일 그리고 공동전술 등을 구사했으며, 이는 기업별노조체제 하에서 ‘최선의 공동투쟁’이었다. 다른 한편 전노협은 전국적 수준의 연대와 전국적 차원의 중앙조직 결성을 가로막는 노동법 개정을 주요한 투쟁 과제로 설정하여, 매년 투쟁을 전개해왔다. 이 점에서 전노협이 95년까지 일관되게 전개해온 투쟁들은 임금인상 투쟁, 노동악법 분쇄투쟁, 민주노조 사수투쟁 등이라고 이야기할 수 있다.
하지만 앞서 언급한 바와 같이 출범 이후 전노협 활동에서 가장 어려웠던 점은 일상적인 활동조차 어렵게 하는 정부의 대대적인 탄압이었다. 동시에 친노동자 정치세력이 부재한 조건에서 전노협은 정치적인 성격을 짊어지는 조직적 하중을 견뎌내어야만 했다. 이러한 와중에서 등장한 논쟁이 “전투적 조합주의”를 둘러싼 문제였다. 이른바 전노협 노선을 전투적 조합주의라고 부르는 논자들은 전노협의 급진적 정치노선이 노조 조직률 하락, 조합원과 간극 확대 등을 낳았다고 비판하면서, 전노협이 중소사업장이라는 협소한 조직적 기반에 기초한 급진주의와 거리를 두지 않을 때 고립을 자초할 것이라고 주장하며, 진보적 노동조합주의, 민주적 코포라티즘 등의 대안을 제시했다.
그러나 이들 전노협 내지 전투적 조합주의에 대한 비판론자들은 ‘눈 뜬 장님’들이었다. 일상적 조직 활동조차 안정적으로 진행하기 어려운 조건 하에서, 이들은 조합원들의 처절한 전투적 집단행동을 ‘급진주의’로 사납게 몰아부쳤던 것이다. 흔히 운위되는 전노협의 강력한 투쟁성, 이른바 ‘전투성’이란 이념적 수준의 급진주의 그 자체가 아니었다. 여전히 전노협이 내세운 ‘평등사회’, ‘노동해방’은 구체적인 대안적 이념이 아니었으며, 밑으로부터 전투적 집단행동은 조직사수를 위한 방어적 투쟁인 동시에 전방위적인 탄압과 구속이란 구조적 조건에서 노조와 조합원 그리고 지도부가 유일한 선택지였다. 오히려 주기적으로 등장했던 노동운동 위기론과 전투적 조합주의 비판은 노동자운동의 급진적 지향을 하향 평준화시키려는 시도의 일환이었다고 보는 것이 타당할 것이다.
동시에 과도적 조직으로서 스스로의 위상을 위치 지웠던 전노협은 민주노조 총단결을 위한 조직발전 논의에 돌입했다. 당시 전노협 이후 전국적 노동조합의 상을 둘러싸고 두 가지 상이한 견해가 공존했다. 그 중 하나는 민주노조의 투쟁성을 중시하며 형식적 조직재편보다 투쟁성을 발전시킬 운동의 조건 강조하는 입장이었다(이른바 “전노협 중심론”), 또 다른 견해는 전노협, 업종회의, 대기업노조 등을 모두 껴안고 가는 업종별 단위 중심의 논의였다(“전노협 한계론”). 이 두 견해는 잠재되어 있다가 정부의 탄압으로 전노협의 조직적인 위축으로, 조합대중과 결합도 등이 약해지자 내부적 위기의식 하에 조직발전 논의가 본격화되었다. 대표적 쟁점이 전노협 중심으로 민주노조를 포괄하는 것이 타당한가에 대한 문제인데, 이는 전노협 선거에서 “전노협 중심론”을 주장한 양규헌이 당선되며 대중적인 지지를 얻었지만, 94년 민주노총 준비위 이후 “전노협 한계론”이 득세하면서, 민주노총으로 전화를 맞게 되었고 전노협 한계론이 87년 이후 노동운동사 서술에서 ‘주류’를 차지한 듯 보인다.
이제 전노협이 창립된 지 어언 20년을 목전에 두고 있다. 대학시절 “새날이 밝아온다 동지여 한발두발 전진이다”로 시작되던 전노협 진군가에 감격하던 때가 어제 일 같다. 전노협 해산 이후 한국 노동운동은 과연 스스로 ‘한계’라고 규정했던 전노협을 넘어섰을까? 무권리상태의 중소사업장에서 민주노조를 만들고, 전투적인 투쟁을 통해 지역 내 연대를 쌓아갔던 전노협 정신을 민주노총과 현재 노동자운동은 잊은 것은 아닐까? 이제 깊은 위기의 수렁에 빠진 노동자운동의 복원을 위해 ‘전노협과 그 시대’에 대한 본격적인 논의가 필요한 시점임을 이야기하고 싶다. 그것이 ‘노동자역사 한내’의 숙제이기도 할 것이다. “노동자 해방의 그날을 위해 이제는 하나다 전노협”을 우렁차게 외치던 전노협 정신의 현재적 평가가 한시라도 시급하게 이루어져야 할 것이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