첫 공동체 활동 '4-H구락부' 양규헌┃노동자역사 한내 대표 급작스러운 도망자 신세 1972년도 초반에 갑자기 도망자 신세가 되었다. 그때는 노동운동을 하기 전이라 운동을 하다가 수배된 상황은 아니고 가발공장을 다니던 중 동료와 싸운 것이 하나의 사건이 되어 도망을 가야 할 형편이었다. 급작스럽게 도망간다는 것은 좋게 말하면 무전여행인 셈이나, 실상은 집을 떠나 막막한 생활이 시작된다는 뜻이다. 서울역 ‘해태의 집’(당시는 지하철이 없는 때라 서울역 지하도에 해태의 집이라는 가게가 있었다)에서 친구들을 급하게 만나 내 형편을 이야기하고 그들이 마련해준 배낭, 텐트, 코펠과 돈, 통기타 그리고 누룽지 등을 챙겨 야간 완행열차를 타고 대전에 도착했다. 새벽에 도착한 대전역에서 날이 밝기를 기다렸다. 그런데 친구들이 마련해 준 물건 중에 가장 중요한 돈이 지갑 채 없어졌다. 막막함에 암담함이 더해졌지만 어디론가 가야 한다는 생각만 하고 어딘지도 모르는 길을 걷기 시작했다. 마냥 걷다가 버스가 와서 손을 들고 탔는데 돈이 없다는 이유로 조수(버스 앞문은 여성 차장, 뒷문은 남성 조수)에게 욕만 먹고 강제로 내쫓겼다. 화가 치밀어 올랐지만 버스는 떠난 뒤였다. 다시 걸음을 재촉하다가 다음 버스가 오는 것을 보고 손을 들어 그 버스에 올라타서는 차장에게 사정 얘기를 하며 차 좀 태워달라고 했더니 순순히 그렇게 하라는 말에 내 얼굴은 환하게 화색이 돌았을 것이다. 아무런 연고 없는 무주군 안성면에 정착 덜컹거리는 버스를 타고 한참을 달리는데 파릇하게 솟아나는 새싹과 함께 강같이 흐르는 계곡물이 차창 밖으로 스쳐 가고 있었다. 차장에게 내려달라고 했다. 어딘지도 모르는 곳에 내려 계곡물을 따라 오르다가 뚝방에 앉아 코펠에 계곡물을 떠와서 누룽지를 우걱우걱 먹었다. 그 때 뚝방 옆에서 보리밭을 매던 아주머니가 뚝방으로 올라와 의심스런 눈초리로 쳐다보며 “멀쩡하게 생긴 총각이 웬 누룽지를 먹고 있느냐?”며 먹다 남은 밥이 좀 있는데 줄까 묻는다. 이거저거 가릴 상황이 아니어서 냉큼 대답했더니 대소쿠리를 건네는데 양은 꽤 많았지만 보리쌀을 삶아 놓은 밥이었다. 적지 않은 밥을 후딱 해치운 나를 바라보며 그 아주머니는 이것저것 묻기 시작한다. 나는 사고 치고 도망 왔다고 할 수가 없어서 거짓으로 꾸며댔다. “도시 생활에 염증을 느껴 머슴 일이라도 하며 농촌 생활을 하고 싶어 왔다”고. 몇 번을 확인하신 아주머니는 나를 그 동네 이장에게 소개했고, 이장님과 면담(?)에서 ‘새끼 머슴’으로 계약을 했다. ‘새끼 머슴’이란 농사일이 서툴다는 뜻이고 아울러 새경(일한 대가)은 거의 없고 숙식과 담배만 계약조건에 들어있었으니 계약이라고 할 수도 없다.  영암 4H운동 표석. [출처 : 한국민족문화대백과사전]
4-H구락부 활동과 새마을 가꾸기 사업 그 동네는 100여 호를 이룬 부락이었는데 그 부락에는 4-H구락부(클럽을 구락부라고 호칭) 활동이 활발했다. 옆집에 사는 내 또래 친구 소개로 나도 4-H구락부 회원이 되었다. 4-H운동은 머리, 마음, 손, 건강의 영문 첫 글자를 따서 4-H라고 하며 그 의미는 ①명석한 머리로 ②충성스러운 마음을 지니고 ③부지런한 손과 ④건강한 몸을 지닌 10~21세의 청소년을 뜻하는데 4-H구락부는 청소년만 있는 것이 아니라 청년들도 함께한다. 이 시기에 ‘농촌새마을 가꾸기’가 농촌에서 하나의 운동으로 펼쳐지면서 4-H구락부와 혼재되었으나 청소년층은 대부분 4-H구락부, 중장년층은 새마을 가꾸기 사업에 편재되었다. 마을에서 거의 유일하게 신문을 보는 새마을 지도자는 4-H운동을 꼭 ‘포에이치 운동’이라고 했다, 어른들은 새마을운동과 4-H운동을 구별하지 못했고 굳이 구분한다면 새마을은 성인운동, 4-H는 청소년운동이었다. 4-H구락부는 중고등학교에 못 간 십 대와 이십 대 청소년들이 농촌계몽운동을 하는 곳이었다. 4-H에 참여한 지 3개월쯤 후에 나는 4-H구락부 회장을 맡게 되었다. 회장으로 추천된 이유는 학벌이 높다는 것과 기타를 친다는 것 때문으로 기억한다. 밤에는 마을회관에서 4-H회원들을 대상으로 통기타 강습을 하면서 친목을 쌓아나갔다. 내가 머슴 사는 앞집은 과수원이었는데 과수원집 딸도 통기타를 갖고 있어서 강습이 진행되었으나 기타 2대로 15명에게 기타를 가르친다는 것은 그 자체가 무리였다. 그나마 기타를 치며 노래 부르는 수준까지 도달한 것은 과수원집 딸로 기억한다. 그 친구는 나보다 한 살 아래로 나에게 호의를 베풀었다. 가끔 머슴방에는 청자 담배와 과일들이 놓여 있었는데 주인집 아주머니 말로는 과수원집 딸이 나를 좋아하는 것 같다고 했다. 몇 번씩 그 말을 들으며 나는 괜히 얼굴이 화끈거렸을 뿐, 머슴 주제에 과수원집 딸과 눈길이 마주치는 것조차 불편했다. 두레의 현대판 공동체 활동 4-H구락부는 회원들과 함께 아침 일찍 빗자루를 들고 마을회관 마당에 모여서 체조를 하고, 신작로에 ‘자갈 부역’(비포장도로에 자갈을 지고 와서 깔아줌)을 하기도 하며, 마을 길을 청소하거나 때로는 마을로 들어오는 행길(‘한길’의 방언) 양쪽 길섶에 코스모스 따위의 꽃을 심어 마을을 깨끗이 하고 아름답게 만들기도 했다. 그때마다 마을 이장은 “새벽종이 울렸네. 새아침이 밝았네”로 시작하는 새마을 노래를 틀어주는데 스피커가 유난히 시끄럽게 귀를 자극했다. 회원들은 하나의 공동체가 되어 차례로 각각의 논밭을 돌아가며 공동으로 담배밭에 물 주기와 모내기를 하기도 했고, 김매기, 보리타작도 함께 했다. 농촌새마을 가꾸기는 농촌의 적극적인 참여와 성과로 인해 1972년 새마을은 ‘사업’에서 전 국민적 참여를 요구하는 ‘농촌새마을운동’으로 확장·시행되었다. 국가통치이념으로까지 확대·발전시켰던 박정희의 4-H운동은 새마을운동과 중복돼 새마을운동의 하나로 추진되다 슬그머니 ‘새마을청소년회’로 바뀌었다. 새마을 가꾸기에서 새마을운동으로 전환되면서 마을에는 시멘트와 철근이 대량으로 실려 오고 중점적으로 마을 진입로 확장, 공동빨래터, 공동우물 등 공동사업이 진행되었다. 점차 담장을 보수하고 지붕을 개량하면서 마을에 지원금도 전달되었다. 지원금이 담긴 봉투에는 기관, 정부, 국가가 적혀있는 것이 아니라 대통령 박정희가 적혀있었다. 4-H운동을 꼭 포에이치 운동이라고 했던 새마을 지도자는 마을에 지원하는 물품과 돈을 “위대한 지도자 박정희 대통령께서 하사하신 것”이라고 늘 강조했다. 일주일에 이틀은 분식의 날이었는데, 분식을 먹는 날에는 그 분량만큼의 쌀을 항아리에 저축했으니 허기의 저축이나 마찬가지다. 면 소재지 장터 한구석에는 찢어진 고무신을 때우고 대나무 살로 된 우산을 수리하고 구멍 난 냄비를 땜질하려는 사람들이 줄을 섰다. 대부분의 삶이 이러함에도 농촌 사람들에게 박정희 대통령은 영웅이었으며 모두를 잘살게 해준다는 믿음과 희망을 품고 있었다. 나 또한 예외가 아니었다. 머슴 생활 11개월 즈음, 공동체 활동으로 정들었던 4-H 회원들과 눈물의 작별을 하는데 과수원집 딸은 엉엉 소리 내며 재를 넘어 신작로까지 회원들과 함께 따라왔다. 그들을 뒤로하고 하루에 두 번 다니는 시외버스에 몸을 실었다. 버스 창밖으로 보이는 그들 손에는 광목을 찢어 만든 손수건(?)이 펄럭이고 있었다. 지금은 할머니 할아버지가 되었겠지만 서로 솔선수범했고, 정겨움을 눈동자로 나누며 4-H구락부에서 사업을 놓고 서툴게 토론했던 그들이 보고 싶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