모택동과 한국전쟁 (4)
우리말 옮긴 이: 이영민 외나무 다리에서 적과 만나다. 중국 인민지원군이 갑자기 한국전쟁에 출현하자 미국 정가에 갖가지 추측이 난무했다. 미국 군부는 중국이 북한에 들어가 참전한 목적에 세 가지 가능성이 있다고 보았다. 첫 번째는 국경 안전과 압록강 수력발전 설비를 뜯어가기 위해서라는 것이었다. 두 번째는 전략적으로 미국을 견제하기 위해 제한적인 지구전을 펼 것이라는 것이었다. 세 번째는 UN군을 한반도에서 쫓아내기 위해서라는 것이었다.(주1) 맥아더는 지원군이 압록강을 건너는 것을 막으려고 “최후의 공세”계획을 제기하는 도박을 했다. 먼저 공군으로 압록강의 모든 다리와 나루를 파괴하고 재차 지상공세를 폈다.(주2) 미 제 10군이 장진호를 지나 서쪽으로 진격하고 제 8집단군이 청천강에서 북상하였다. 두 군이 강계 남쪽에서 만나 지원군과 조선 인민군을 포위 섬멸한 뒤 압록강으로 밀고 올라가려는 것이었다. 강계에는 북한 최고 수뇌기관의 소재지였으며 압록강에서 50킬로 떨어져 있었다. 모택동은 한바탕 악전고투를 피할 수 없음을 예견했다. 동쪽 선의 역량을 강화하기 위해 그는 10월초에 송시륜(宋时轮)이 인솔하는 제 9병단을 북한에 투입하기로 결심했다. 11월 5일, 팽덕회, 등화에게 전문을 쳤다. “강계, 장진 방면은 송의 병단이 맡아 전력을 다할 것을 확정하라. 적을 깊이 끌어들여 각개 격파, 섬멸할 기회를 노리도록 하라. 그후 병단을 당신이 그곳에서 직접 지휘하라. 우리가 먼 곳에서 통제하지 않겠다.”(주3) 1차 전역에서 승리하고 동쪽 방면 병력을 강화한 뒤 11월 13일, 주은래는 스탈린에게 보낼 모택동의 전문을 기초했다. 모택동은 이 전문을 읽은 뒤 한마디 덧붙여 썼다. “우리가 관찰하기에 조선 전황은 변화될 수 있다. 지금 우리 지원군 16개 사단이 조선 서북전선에서 적에게 첫 번째 타격을 입혔다. 우리는 이미 첫걸음에 입지를 확보했다. 다시 그곳의 적 8개 사단에게 비교적 큰 타격을 입힐 수 있다면 전선을 방어국면에서 공세국면으로 바꿀 수 있다. 그것은 가능한 일이다. 동북방면 전선은 우리 지원군이 2개 사단에 지나지 않는다. 적은 5개 사단이 제멋대로 날뛰고 있다. 지금 8개 사단을 증파하여 적에게 타격을 입힐 준비를 하고 있다. 그러면 그쪽도 전황이 바뀔 것이다.”(주4) 11월 중순, 제 9병단 3개군 12개 사단은 비밀리에 북한에 들어갔다. 그들은 북한 동쪽에 신속하게 집결했다. 제 9병단이 북한에 들어가자 지원군 총병력은 9개군 34개 사단 38만명으로 증강되었다. 이제 동서 양쪽에서 모두 병력의 우세를 보이게 되었다. 하지만 적은 북한에 있는 중국군을 6만에서 7만명 정도로 추측하고 있었다. 11월 6일부터 서쪽방면의 적이 탐색전 성격의 공격을 시작하였다. 지원군의 병력규모와 의도를 파악하기 위해서였다. 팽덕회는 각 부대를 청천강 북쪽으로 차례로 후퇴시켰다. 적에게 약하게 보이려는 의도였다. 그리고 일부러 부서진 총을 버리기도 하였다. 맥아더는 계략에 빠져 지원군이 “장비가 열악하고 패전을 두려워한다.”고 생각하게 되었다. 그는 부대에 명령하여 북쪽으로 돌진하게 하였다. 24일 UN군은 동서 양쪽 방면에서 동시에 전면공격을 시작했다. 목표는 압록강변 삭주,벽동과 북한 최고 수뇌부가 있는 강계를 겨냥하였다. 그들은 성탄절 전에 한국전쟁을 끝내겠다고 선언하였다. 11월 25일, 서쪽 방면의 적이 지원군이 예정한 전장으로 유인되었다. 지원군은 즉시 2차 전역을 개시하였다. 그날 밤은 마침 보름달이 훤하게 비추었다. 지원군이 야전을 치르기에 더없이 좋은 날씨였다. 지원군 서쪽방면 부대들은 갑자기 맹공격을 퍼부었다. 1개군을 세 갈래로 나누어 덕천에 있는 한국군 1개 사단을 협격하였다. 그들은 지원군의 전면에 고립되어 노출된 상태였다. 26일 저녁까지 그 사단 5천명을 전부 섬멸하였다. 지원군의 1개 군도 영원등에서 한국군 1개 사단 대부분을 섬멸했다. 지원군이 덕천, 영원에서 어려움을 이기고 승리한 뒤 청천강 북쪽의 적은 대부분 그 자리에서 행동을 멈추고 지원군과 대치상태에 들어갔다. 이때가 바로 분할된 적을 섬멸하기에 더없이 좋은 기회였다. 팽덕회는 즉시 모택동의 전문 명령에 따라 서쪽 방면의 적을 분할 포위한 뒤 각개격파하라고 지시했다. 이때 제 38군 제 113사단 주력은 소로를 따라 질풍같이 내달렸다. 그들은 미 항공기 위협에도 거리낌없이 14시간동안 50킬로를 전진했다. 28일 오전 8시에 3개 지점에 도착하여 미 9군의 남쪽 퇴로를 막아버렸다. 얼마 뒤 그들은 다시 용원리로 기동하여 적의 남은 퇴로마저 차단하였다. 정면의 지원군 4개 군은 기세를 타고 맹공하여 눈앞의 적을 분할 섬멸하였다. 29일, 서쪽 방면의 적은 압박을 당해 모든 곳에서 후퇴했다. 그와 함께 미 1기병사단과 영 국 제 29여단을 북상시켜 지원하게 하였다. 어떤 대가를 치르더라도 삼소리, 용원리의 포위를 풀라는 명령이었다. 이렇게 서쪽 방면 전장에서 적과 아군사이에 형세가 반전되는 현상이 만들어졌다. 그후 정리된 전장의 상태를 보면 적은 지원군의 남북협격에 처해 있었다. 하지만 삼소리, 용원리의 부분적 형세는 지원군이 적의 남북 협공에 빠져 매우 위중한 상황이었다. 만약 삼소리나 용원리를 잃는다면 청천강 서쪽과 북쪽의 적이 전부 남쪽으로 달아날 가능성이 있었다. 그러면 제 2차 전역에서 적을 섬멸하는 목표가 수포로 돌아가는 셈이었다. 제 38군 제 113사단은 매일 백대의 항공기가 교대로 폭격하는 가운데에서도 버텨냈다. 그들은 차례차례로 탱크, 포병, 보병의 협동작전을 격퇴했다. 그래서 후퇴하는 적과 지원하던 부대가 1킬로 안까지 접근했지만 끝내 연결하는 것을 차단하여 중국 인민지원군의 위명을 떨쳤다. 이 감격적인 영웅들의 전과는 팽덕회 사령관의 깊은 감동을 자아냈다. 그는 축전가운데 이례적으로“38군 만세”라는 여섯 글자를 더했다. 11월 1일, 적은 포위망을 벗어날 가능성이 없어 보이자 대량의 중장비를 내버리고 서해안에 있는 안주 방향으로 방향을 바꿔 포위를 뚫고자 했다. 이때 동쪽 방면의 제 9병단은 11월 27일 영하 30도의 혹한을 뚫고 반격을 개시했다. 중국인민지원군에게 심각한 타격을 입고 있을 때 오만한 맥아더도 어쩔 수 없이 인정했다. “이것은 규모가 작은 부대이다. 지금 상황은 사실상 선전포고하지 않은 전쟁중 중국과 만난 것이다. 적극적이고 신속하게 행동해야 한다. 그렇지 않으면 승리할 희망이 사라진다. 또한 실력으로 계속 소모시켜 적을 모두 섬멸해야 한다. 그것이 내가 기대하는 것이다.”(주5) 그는 동서 양면에 있는 군대에게 12월 3일 삼팔선 쪽으로 총퇴각을 명령했다.(주6) 모택동은 즉시 서쪽방면 부대에게 평양진격을 명령하고 점령할 기회를 노렸다. 12월 6일, 중국 인민지원군과 조선 인민군은 평양을 수복했다. 16일, 서쪽 방면의 적이 전부 삼팔선 남쪽으로 후퇴했다. 동쪽 방면에서는 인민군이 원산을 수복하였고 적의 육상퇴로를 끊었다. 지원군은 17일 함흥을 점령했으며 24일 흥남을 수복했다. 이렇게 되자 동부 해안의 양양을 제외하고 UN군은 모두 삼팔선 남쪽으로 후퇴하였다. 제 2차 전역에서 적 3만 6천명을 섬멸했는데 그중 미군은 2만 4천명이었다. 전역이 승리로 끝나 지원군과 인민군은 방어에서 공세로 전환하여 전쟁의 주도권을 쥐게 되었다. 지원군은 두 차례 연속하여 승리하였다. 그러자 사람들 머릿속에 속전속결하여 이기자는 생각이 자리잡게 되었다. 그러면 한국전쟁 전황도 그런 방향으로 갈 것인가? 속전속결인가, 지구전인가? 그것이 모택동 앞에 문제였다. 그는 이 중대한 문제에 답을 만들어야 했다. 2차 전역을 일으킨 지 얼마 되지 않은 1950년 12월 3일, 모택동은 김일성과 회견했다. 그때 모는 한국전쟁 전황에 대하여 두 가지 예측을 한 일이 있었다. “전쟁이 빨리 끝날 수 있다. 하지만 길어질 수도 있다. 우리는 최소한 1년 정도 가는 것으로 준비해야 한다. 조선쪽도 길게 보고 준비해야 한다.” 이런 말을 할 때 모택동은 장기작전에 중점을 두었다. 그는 다시 김일성에게 말했다. “당신들 지금 전보다 좀 나아졌소? 오히려 약화된 것 아니오? 당신들 삼팔선을 넘어 대구를 공격할 때 후방이 비었잖소? 그때 당신들이 가장 안 좋았소. 지금 당신들은 승리도 해보았고 실패도 해보았소. 경험이 있으니 당신들이 더 강해진 거요.”(주7) 2차 전역이 끝난 뒤 모택동은 두 차례 경험을 토대로 평덕회등 사람들의 의견을 들었다. 그리고 한국전쟁 발전방향에 대하여 명확한 회답을 내놓았다. “전쟁이 길어질 것에 대하여 의연히 대비해야 한다. 앞으로 닥칠 수많은 어려움도 예측해야 한다. 힘겨운 투쟁을 겪지 않으면 한국군을 전부 또는 대부분을 섬멸할 수 없다. 힘겨운 싸움없이 미군과 영국군 사오만명을 섬멸할 수도 없고 조선문제도 해결하기 어렵다. 속전속결 관점은 이롭지 않다.”(주8) 중국 인민지원군은 두 번 연속 전역에서 승리했다. 이 승리는 국제정세에 중요한 영향을 끼쳤다. 당시 중공 중앙 판공처 주임이던 양상곤(杨尚昆)은 이때를 이렇게 기록했다. “우리 지원군이 북한에 들어가 두 차례 전역에서 승리했다. 그 뒤 우리나라 지위가 올라가고 발언권이 세졌다. 민주진영의 위세도 높아졌다. 제국주의 진영은 날로 지리멸렬하는 형국이 되었다. 미국 내부는 물론이고 미국과 영국사이, 영국내부에 모순이 증가했다. 영불사이, 기타 국가와 미영사이에도 모순이 커지고 갈등도 확대되었다. 미제국주의가 더 고립되기 시작했다. 주석이 지원군의 북한 입국을 결정한 것은 참으로 영명한 것이었다. 멀리 내다본 결정이었으며 오늘에 와서 흑백이 분명해졌다. 당시 나보고 결정하라고 했으면 ”일시적 안전“에 치우쳤을 것이다. 주석이 말한 것처럼 짧게 보면 안 된다. 멀리 내다보고 길게 내다보아야 한다. 눈앞의 것만 보면 절대로 안되며 눈앞의 길만 볼게 아니라 먼 곳의 모습을 보아야 한다. ‘선견지명’이란 바로 이 결정을 가리키는 것이다.”(주9) UN 내부의 투쟁 중국인민지원군이 2차 전역을 개시할 때 중국정부는 UN 안전보장이사회에서 미국과 날카로운 정치투쟁을 벌였다. 11월 28일 오후 중국은 오수권(伍修权)을 대표로 특파하여 UN안전보장이사회에서 발언했다. 그는 미국이 대만을 무장 침략한 것을 토론하는 회의에서 장시간 발언했다. 미국이 중국영토인 대만을 무력침략한데 대하여 규탄했던 것이다. 오수권은 중국정부를 대표하여 UN 안보리에 3개항의 제안을 제출했다. 1.미국이 중국영토인 대만을 침략한 것과 한반도에 무력간섭한 죄를 엄중하게 제재할 것 2.미국정부는 대만에서 무력침략 병력을 완전히 철수토록 할 것 3.미국과 다른 외국군대는 한반도에서 전부 철수할 것.(주10) 중국이 이렇게 공정하고 합리적인 제안을 하였지만 표결결과 미국의 조종에 따라 부결되었다. 하지만 정의로운 목소리는 전 세계에 울려 퍼졌다. 중국인민들은 기를 펴게 되었으며 해외 애국화교들은 고무되었다. 중국정부가 안보리에서 미국과 정치투쟁을 벌일 때 중국 인민지원군은 한국전쟁에서 미국과 군사투쟁을 벌이며 생동하고 있었다. 생각했던 대로 2차 전역을 마친 뒤 지원군은 휴식과 정돈에 들어갔다. 그리고 두 번째 해 봄의 새로운 반격을 준비했다. 하지만 국제정세는 중국 인민지원군이 두 번째 해의 춘계공세를 벌일 때까지 기다려주지 않았다. 1950년 12월 14일, 중국대표가 참가하지 않은 가운데 UN은 토론을 벌였다. 그 결과 미국이 조종하는 UN은 불법적으로 ‘한국정전 3인위원회’ 성립 결의를 통과시켰다. 그리고 즉시 휴전할 것을 요구했다. 12월 22일, 주은래 총리는 바로 성명을 발표하여 비판했다. 주총리는 미국정부가 자신들의 침략군이 실패한 오늘 ‘선정전 후담판’을 제출한 것은 “미국이 숨 돌릴 시간을 얻어 다시 싸울 준비를 하기 위한 것”이라고 폭로했다. 그는 “미국이 최소한 현재 침략한 진지를 유지하고 반격을 준비할 것”이라고 비판했다. “그래서 외국 군대가 모두 한반도에서 철수하고 조선의 내정은 조선 인민들이 해결하는 게 기본이다. 그 기초위에서 정전에 관한 토론을 해야 하며 그렇지 않으면 모두 거짓이다. 그것이 바로 미국정부의 의도에 부합하는 것이며 세계의 평화를 사랑하는 인민들의 선량한 희망에 이르지 못할 것”이라고 주장했다.(주11) 미국정부가 ‘선정전 후담판’이라는 카드를 만지작거리며 준비할 시간을 얻어 다시 싸우려는 시도에 대하여 모택동은 일찍이 예견하고 대책을 제기하였다. 그는 12월 3일, UN이 ‘정전결의’를 통과시키기 11일전에 김일성과 회견했다. 그는 “적이 정전을 요구할 가능성이 있다. 우리는 반드시 적이 조선에서 철수해야 하고 우선 삼팔선 이남으로 철수하는 것을 인정할 때 비로소 정전을 담판할 수 있다고 생각한다. 우리가 평양을 가지는 것은 물론 서울도 가질 때 가장 좋다. 적을 섬멸해야 하고 먼저 한국군을 섬멸하는 게 중요하다. 그래서 미제국주의가 군대를 철수하도록 하는데 역량을 더해야 한다.”(주12) 12월 13일 UN이 ‘정전결의’를 통과시키기 하루 전 모택동은 팽덕회에게 보낸 전문에서 다시 강조하며 제기하였다. “지금 막 미영 각국이 아군에게 삼팔선 북쪽에 정지하라고 요구하고 있다. 자신들 군대를 정비하여 다시 싸우는데 이용하려는 것이다. 우리는 반드시 삼팔선을 넘어야 한다. 삼팔선 북쪽에 바로 멈춘다면 정치적으로 매우 불리하게 된다.”(주13) 적이 숨 돌릴 시간을 주지 않고 삼팔선을 공격, 넘어섬으로써 정치적으로 주도권을 쥐려는 것이었다. 곧바로 제 3차 전역을 개시할 필요가 있었다. 하지만 연속작전으로 서쪽 방면 부대들은 너무도 피로하였으며 전투에서 줄어든 병력이 4만여명에 이르렀다. 동쪽 방면의 9병단도 추위에 얼거나 굶어서 감원이 대량으로 생기고 있었다.(주14) 서쪽 방면은 수송차량이 3백량에 지나지 않았다. 하지만 보급선은 1차, 2차 전역에 비해 두 배로 길어졌다. 적지 않은 전사들이 아직도 추위를 이길 수 있는 솜외투나 솜신발을 갖추지 못했다. 이런 상황에서 바로 3차 전역을 개시했으니 곤란한 점이 아주 많았다. 하지만 지원군 총사령부는 정치정세의 필요에 따라 부대를 계속 남진하도록 하달했다. 모택동은 지원군 총사령부의 작전배치를 승인했다. 이번 전역은 중국 인민지원군 6개 군과 조선 인민군 3개 군단이 함께 진행하였다. 1950년 그믐날인 12월 31일 17시, 중국군대는 모든 전선에서 공격을 시작했다. 약 2백 킬로의 넓은 정면을 일거에 돌파하여 UN군 방어선을 종심으로 15에서 25킬로미터 전진했다. UN군은 중국 군대가 우익으로 우회하여 포위할까 두려워했다. UN군은 10만 병력이 한강 북안에 몰려 궁지에 빠질까봐 1951년 1월 2일 전체 전선에서 후퇴하였다. 팽덕회는 승세를 타고 전과를 확대하기로 결정했다. 중국과 북한군대는 4일 서울을 점령했으며 5일 한강을 건넜다. 8일에는 인천을 수복했다. UN군은 37도선 부근까지 물러나 수비에 들어갔다. 중국과 북한 군대는 맹렬한 공세로 도시를 공격하고 땅을 빼앗았으나 오히려 적을 대거 섬멸하지는 못하였다. 적은 역량을 보존했으며 오히려 아군이 깊이 들어오도록 유인하였다. 측후방에서 상륙하여 중국군대를 협격하려는 기도였다. 이런 점을 고려하여 팽덕회는 과단성있게 추격중지 명령을 내렸다. 이로써 3차 전역이 끝이 났다. 제 3차 전역이 끝난 뒤 휴식하며 부대를 정돈할 것인지, 다시 남진할 것인지 문제를 놓고 팽덕회와 김일성의 의견이 엇갈렸다. 모택동은 팽덕회의 의견에 찬성했다. 즉 지원군이 인천 및 서울 북쪽에서 두 달에서 세 달가량 쉬면서 정돈하도록 한 것이다. 하지만 그는 반드시 조선 동지의 의견을 존중해야 하고 특히 그들과 단결을 잘 유지해야 한다고 생각했다. 1월 19일, 모택동은 팽덕회가 중조군대 고급간부 연석회의에서 보고할 원고를 손질했다. 특별히 한 부분을 덧붙였는데 “조선에 있는 모든 중국 지원군 동지들은 열심히 조선동지들에게 배워야 한다. 전심전력으로 조선 인민들을 옹호해야 하며 조선민주주의 인민공화국 정부를 지지해야 한다. 조선 인민군을 옹호해야 하며 노선 노동당을 옹호해야 한다. 조선인민의 영수인 김일성 동지를 옹호해야 한다. 중조 양국동지들은 친형제처럼 일치단결해야 한다. 동고동락해야 하며, 생사를 서로 의지하고, 적에게 승리하기 위해 끝까지 분투해야 한다. 중국 동지들은 조선의 일을 자기 일로 간주하고 조선의 산과 물, 초목까지도 아끼도록 교육해야 한다. 조선 인민의 것이라면 바늘 하나, 실 한 올도 폐를 끼쳐서는 안 된다. 우리가 나라 안에서 하던 생각이나 하던 일과 똑같이 하면 그것이 바로 승리할 수 있는 정치적 기초가 될 것이다. 우리가 그렇게 한다면 최후의 승리를 반드시 얻을 수 있을 것이다.” 그는 다시 전문으로 이 부분을 지원군 당위원회에 전하도록 했다. 이런 당부는 항미원조 전쟁이 결정적인 국면으로 발전할 즈음 중조 양당의 우의를 다지게 하였다. 또한 양국과 양국 군대의 단결을 강화하는데 중요한 역할을 하였다. 1월 20일, 팽덕회는 즉시 이것을 지원군 당위원회 회의에서 전달하고 결정토록 했다. 1월 25일 소집한 양군 고급간부 연석회의에서 허심탄회하게 조선동지들에게 배우게 하였으며 조선 군민회의에서 중요한 내용이 되어 서로 단결하게 하였다.(주15) 1) 미국 제임스·F·슈나벨 (James·F·schnable) : '한국전쟁중의 미국육군‘ 제 2권, 국방대학출판사 1990년12월판, 제 276-277쪽 2) ‘맥아더 회고록’ 상해 역문(译文)출판사, 1984년 3월판, 제 271-272쪽 3) 모택동이 팽덕회, 등화에게 보낸 전문. 1950년 11월 5일 4) 모택동이 스탈린에게 보낸 전문. 1950년 11월 13일 5) 맥아더가 미국 참모장 연석회의에서 보고한 내용. 1950년 12월 3일, ‘트루먼 회고록’에서 인용. 제 2권, 세계지식출판사 1965년 1월판, 제460쪽 6) 일본 육군 전사연구보급회편 ‘조선전쟁’ 중편, 국방대학교 출판사 1990년 8월판, 제185-186쪽 7) 모택동이 김일성과 회견할 때 대화요점. 1950년 12월 3일, 주은래가 팽덕회에게 보낸 전문에서 인용. 1950년 12월 4일 8) 모택동이 팽덕회, 박일우 및 김일성, 고강에게 보낸 전문. 1950년 12월 26일 9) 양상곤 일기, 1951년 1월 1일 10) 1950년 11월 30일 ‘인민일보’ 11) 1950년 12월 23일 ‘인민일보’ 12) 모택동이 김일성을 회견할 때 진술 요점, 1950년 12월 3일. 주은래가 팽덕회에게 보낸 전문 인용, 1950년 12월 4일 13) 모택동이 팽덕회 및 고강에게 보낸 전문, 1950년 12월 13일 14) 군사과학원 군사역사연구부 편저 ‘중국 인민지원군 항미원조 전사’ 군사과학출판사 1990년 12월 제 2판, 제28,49,52쪽 15)‘팽덕회 연보’ 인민출판사 1998년 3월판, 제468쪽 |